Ⅲ. 충주경찰서장 시절(1954~1956)
1. 충주직업소년학원 설립
6.25전쟁이 끝나고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 수사사찰과장으로 재직하던 차일혁 선생은 1954년 9월 9일 충주경찰서장으로 발령받았다. 부임해 보니 가장 시급한 문제가 전쟁고아 등 부랑아들의 구제였다. 사정은 전국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6.25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걸인과 부랑아의 격증은 하나의 사회문제로 되어 치안상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다. 부랑고아들은 통행 중인 부녀자와 외국인에 대해 위협적인 언동으로 금품을 달라고 강요하곤 했다. 1954년 4월 22일에 발표된 경범죄처벌법에서는 특히 이들을 규제하는 조항을 규정하였다. 법적 규제로는 한계가 있었다.
1952년 1월 경찰 미고문관의 지시로 서울시내 구두닦이 소년의 일제단속령이 내려 무차별 단속을 하였다. 무차별 단속보다는 선도책의 강구 필요성을 느낀 당시 서울 중부경찰서 보안계 근무 권용팔 순경은 당시 중부경찰서장의 허락을 얻어 구두닦이 행상 등 가두직업소년을 한두 명씩 모집하여 충무로 소재 중앙우체국 한구석에 천막동을 짓고 일요학교라는 간판을 걸고 이들에게 교육을 통한 선도를 별였고 중부서 보안계에 소년지도반을 설치하여 적극적인 선도활동을 별였다. 1954년 8월에는 남산 방송국 뒤편에 천막 6개동을 짓고 서울직업소년학원을 개설하여 428명의 부랑아 가두직업소년을 일시수용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충주에도 비슷한 성격의 학교가 만들어 졌다. 충주 거리에도 유랑 소년들이 많았다. 부모와 집을 잃고 갈 곳 없는 소년, 소녀들은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생활을 하며 연명하고 있었다. 차일혁은 거리나 다방에서 흔히 마주치는 구두닦이 소년들이 신체가 멀쩡하고 두뇌도 명석함에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것을 몹시 안타까웠다. 그 아이들이 자라면 국가의 동량지재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곤 속에서 예비 범죄자로 전락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어 범죄를 예방하는 것 또한 경찰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차일혁은 용기를 내어 특유의 추진력으로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우선적으로 유랑 소년,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개설하기로 했다. 사실 전쟁고아 구제업무는 경찰서에서 해야할 일이 아니었으나 전쟁 중 고아들의 참상을 많이 목격하였고, 이들이 구제책이 없으면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던 차일혁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충주직업청소년학원' 개설 취지를 충주경찰서 직원들에게 설명했다. 충주경찰서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차일혁 서장의 뜻에 동감을 표시하고 월급에서 푼푼이 거둬 '충주직업청소년학원' 개설에 참여했다. 1954년 말에 차일혁은 부족하나마 경찰서 운동장 한모퉁이에 판자로 건물을 짓고 학생들을 모집했다. 정원인 60명이었는데 아이들은 80여 명이나 지원해 왔다. 그 중에는 나이가 스무살이 다 되도록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청년도 있었다. 경찰서가 만들게 된 이 청소년 학교는 개설 당시 9세부터 18세까지의 어린이, 청소년 6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였다. 매일 저녁 3시간의 수업을 했고 3년 편제였다.
교육내용은 초등학교 교과과정이었다. 고급반인 1반은 남아 13명, 여아 4명의 학생으로 구성되었고, 2반에는 남아 30명, 여아 14명이 수학하고 있었다. 직업별로는 구두닦이 25명, 공용아 8명, 신문배달 3명, 점원 6명, 사환 3명, 무직 15명이었다. 학교 교사는 일단 경찰서 직원 중 사범학교 졸업생과 교원 면허를 받은 사람을 뽑아 가르치게 했다. 차일혁도 중국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가르친 경험이 있었으므로 시간이 나는 대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경찰서 직원들의 월급에서 100환 미만의 금액을 모금하여 학생들의 공책, 연필 등 학용품을 구입하고 차량 운행 등의 운영비로 조달했다. 경찰서 차량도 1대 지원해 주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동참하여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일부 직원들은 생활고로 인해 불만을 갖고 있던 것 같았다. 차일혁은 학교를 빌미로 기부금을 거두지 못하게 했다. 그는 지역사회에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으며 운영비는 자체 조달을 원칙으로 했다.
당시 충북일보는 이 '충주직업청소년훈련학원'에 관하여 상세히 기사를 실었다. 초대원장으로 취임한 차일혁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학원을 발전시켜 집도 없고 공부도 못하는 가엾는 부랑아들의 집이 되고 낙원이 되고 희망이 되는 등불이 되도록 하겠다"
학생들은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지만 배우고자하는 열의만은 뜨거웠다. 그 중에서도 원주에서 피난 온 초등학교 5학년을 중퇴한 김영열 군과 한동수 군은 차일혁을 원장아버지라 부르며 잘 따랐다. 하루 종일 고된 일을 마치고 온 아이들이 졸지 않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며 차일혁은 기뻐했다. 그는 4년 넘게 빨치산들과 전투를 하면서 피로 얼룩진 몸과 마음을 씻고자 했으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기쁨을 느끼고 싶어 했다. 차일혁은 자라나는 아이들과 함께 평화의 시대에 마음껏 평화로움을 누리고 싶었다.
서울과 충주에서 시작된 부랑아 대상 청소년직업학교는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1956년 5월 유엔부인회에서 기증받은 1만불로 목공기계 11대와 제봉기 30대, 이발기구 등을 도입하고 UNKRA에서 기증받은 5천불 상당의 건축자재로 기술교육관을 지어 1957년 3월 15일 서울직업소년학교는 낙성을 보게되었다. 이후 전국적인 소년학교 붐을 일으키게 되었다. 1959년 7월 23일 경찰국 보안과에 소년계를 신설, 소년전담경찰을 두었고 소년계도육성, 소년풍기단속, 범죄예방, 어린이 구호 등 소년문제를 취급하고 각 경찰서에 직업소년학교와 경찰어린이회 설치, 가두직업소년 수용, 선도와 교육사업을 전개하여 불우소년의 비행예방에 힘쓰는 계기가 되었다. 충주직업청소년학원은 차일혁 서장이 떠난 후 운영난을 겪다가 1961년, 설치 7년만에 폐교되고 숭덕재활원으로 인계가 되었다.
2. 문화경찰활동
차일혁은 '문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화를 잃으면 우리 마음을 잃고 우리 마음을 잃으면 우리나라를 잃는다." 나라를 잃고, 문화를 잃어 본 처절한 일제 강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말일 것이다. 또한 문화의 가치를 일찍 간파한 선각자인 것이다.
차일혁의 마인드는 백범 김구 선생의 문화국가론관 맥을 같이 한다. ‘백범일지’는 이렇게 기록한다.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인류가 불행한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진정한 평화가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전임 충주경찰서장들이 운영했던 충주문화관 업무를 인계받아 활발한 문화활동을 하였다. 친분이 있던 전옥 단장의 백조가극단과 전옥이 창단 동인인 극단 청춘극장 등 유명 악극단을 초청하여 수준높은 공연을 충주시민들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국창이라 일컬어지는 당대 최고의 명창 임방울 선생을 충주로 초대하여 공연을 하였다.
임방울은 권력을 싫어하여 권력자들이 판소리를 해달라고 하여도 거절하고는 시골장터 등에서 공연을 하던 사람인데 뜻이 맞았던 차일혁 총경의 부탁에 충주까지 와서 공연을 하곤 했다. 충주경찰서장 재직 중 國唱 임방울을 서장 관사로 초청하여 판소리 녹음하였다. 임방울의 판소리는 거의 음반이나 녹음본이 거의 없는데 차일혁의 녹음 진본 릴테이프 8개가 2010년 1월, 광주광역시 임방울 국악진흥재단에 기증되어 국악계에서는 그 가치를 아주 높게 보고 있다.
차일혁은 이러한 문화활동을 벌인 경험을 바탕으로 경찰도 문화활동을 통한 지역사회 공헌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문화경찰'이란 용어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