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20세기를 살다간 차일혁 선생을 회상하며
차일혁(車一赫) 선생이 살다간 20세기는 세계사적이나 민족사적으로 볼 때 ‘세찬 격랑(激浪)이 휩쓸고 간 격동(激動)의 시대’였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 선생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20세도 안 된 어린나이에 중국대륙을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해방 후에는 패망 후에도 서울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일본 형사를 처단했다. 해방공간에서는 민족정기를 앞세우고 건국 및 건군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6·25전쟁이 난 후에는 구국의용대장과 빨치산토벌대장으로 추대되어 후방의 안정과 국권수호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휴전 후에는 빨치산총수 이현상(李鉉相)을 사살함으로써 지리산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왔고, 그 후에는 민주경찰로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들의 민생안정과 치안을 위해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생을 마감했다. 자신을 제외한 그 모든 것을 위한 ‘고뇌와 결단이 응집된 생애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때 나이 38세였다.
생(生)은 짧았으되, 차일혁 선생의 인생 성적표는 대단했다. 대한민국 경찰사상 가장 많은 무공훈장을 받았고, 대한민국 경찰관 중 유일하게 ‘대한민국을 수호한 18인’에 선정됐으며, 대한민국 경찰로서는 유일무이하게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과거 빨치산출신들조차 자신들을 토벌했던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을 존경한 나머지 그들의 행사에 차일혁의 이름이 써진 깃발을 내걸었다. 그런 것만 봐도 차일혁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경찰이었다. 대한민국 경찰의 표상이 되기에 충분한 최고의 무공(武功)과 인품을 갖추었다. 대한민국 경찰은 그런 차일혁 경무관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크게 선양(宣揚)해야 될 것이다.
차일혁 선생은 짧은 생애를 통해 다양한 삶을 살았다. 항일무장독립운동가에서 군인과 전투경찰로 연결되는 무인(武人)으로서의 삶, 민족문화와 예술의 혼을 불사르는 문화인으로서의 삶, 고급스런 유머와 재치를 통해 뭇사람들에게 마음의 울림을 주는 교양인으로서의 삶, 몸에 밴 불교철학에서 나온 사상가로서의 삶,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矜恤)히 여기고 보살펴주려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삶, 저항력을 잃은 빨치산에게 이념을 초월하여 온정을 베풀 줄 아는 진정한 민족주의자로서의 삶, 전란의 와중에도 천년고찰 지키기를 고집한 ‘문화지킴이’로서의 삶, 회식자리에서 일본 노래 부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배일(排日)실천가로서의 삶, 임방울 선생의 판소리를 비롯해 우리 가극과 영화제작에 적극성을 보인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삶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다보니 차일혁 선생의 일생은 단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자신이나 가족을 위한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공적인 일에 몰두해야했다. 그것을 운명이나 숙명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가혹할 정도였다. 신(神)이 있다하더라도 한 인간에게 그렇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차일혁은 그런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한마디 불평 없이 따랐다.
차일혁 선생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다. 차일혁 선생은 자신에게 닥친 어렵고 힘든 많은 일들을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해나갔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일단 그의 손을 거치면 해결됐다. 그가 짧은 일생동안 그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명예와 물욕을 바라고 했다면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차일혁 선생은 평생을 민족과 국가 그리고 힘없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 차일혁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차일혁 선생의 삶을 반추해보면 유난히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조국과 민족, 강인함과 따스함, 단단함과 부드러움, 원칙과 융통성, 온정과 배려, 눈물과 사랑 등이 그것이다. 차일혁 선생을 상징할 수 있는 것들이다. 차일혁 선생은 그런 것들을 남겨놓고 어느 날 우리 곁을 훌쩍 떠났다. 쉬는 날 없이 힘들게 뛰었던 ‘이승의 일’에서 벗어나 이제 영원한 휴식을 취하려는 듯 떠나갔다. 자신이 못다 한 ‘통일’을 후세들에게 남겨 놓은 채 홀연히 떠났다.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가 역사에 남긴 체취와 발자취도 덩달아 크게 느껴지며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그가 그립다. 60주기를 맞아 그에 대한 ‘역사의 그리움’을 여기에 정성스레 담아 본다. 그리고 다시 그를 회상한다. 역시 차일혁 선생이다. 탄성의 교향곡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아니면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것들뿐이다. 이 시대 차일혁 선생이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경찰관의 신분을 뛰어 넘어 ‘국가와 민족의 사표(師表)’로 우뚝 선 차일혁 선생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