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통일이 되면 드넓은 만주평야를 여행하고 싶다’ 범강 차일혁 선생께서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며 생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젊어서부터 남다른 신념과 투철한 가치관을 갖고 있던 차일혁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16세의 나이에 조선인 교사를 연행하는 일본 순사를 폭행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포병장교를 지냈으며 조선의용군에 들어가 중국 화북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면서 항일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광복 후 귀국하여서는 여전히 서울을 활보하고 있는 일본 고등계 형사들을 처단하는 등 일제 청산에 누구보다도 앞장섰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육군 대위로 임명되었다가 부상으로 전역하고 다시 18전투경찰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어 칠보발전소를 탈환하고 파괴와 약탈을 일삼는 빨치산들을 토벌하여 후방지역 안정에 기여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광복 후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국가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많은 지사들이 있었지만 선생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친일경찰이 득세하는 조직 속에서 질시와 불이익을 받으면서도 긍지를 잃지 않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목숨을 다하여 적과 싸우는 전투경찰로서, 그리고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경찰서장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선생은 경찰관이지만 민족주의자였으며, 문화예술인이었습니다. 생사를 다투는 전투를 하면서도 문화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깊었습니다. 가계에서 이어지는 선생의 깊은 문화 사랑이 없었다면 지리산 주변 천년의 문화재들은 사라졌을 것이고 세계에 자랑할 수 없었을 겁니다.
차일혁 선생이 떠나신 지 60여 년이 지났습니다. 비록 38년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대한민국에 깊은 발자국을 남기셨습니다. 우리에게 혜성처럼 왔다가 샛별처럼 떠나셨지만 선생은 전쟁영웅, 호국인물, 경찰로는 유일한 ‘대한민국을 수호한 18인’, 그리고 경찰영웅으로 불릴 정도로 대한민국 경찰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시어 후배 경찰이 가장 존경하는 경찰관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학자들의 많은 연구 활동을 통해 선생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고 학술 논문도 발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생은 ‘국가와 민족의 사표’로 우뚝 섰지만 선생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모두 마쳤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군사전문가와 경찰역사가들을 통해 미진한 업적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본 기념사업회에는 선생의 업적과 그동안 언론과 방송에 소개된 자료들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지만 선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에 오셔서 저희와 뜻을 함께해 주시고 선생이 그토록 바라던 이데올로기의 갈등 해소와 해원상생하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이사장 황 을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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